본문 바로가기
#길위에있을때자유로웠다

[남파랑길 27코스, 청마의 숨결과 폐왕성의 기억]

by 뚜벅이의 계절여행 2025. 10. 10.
728x90
반응형

가을빛이 짙어졌다. 배낭은 가볍게, 마음은 단단하게. 첫 발걸음은 청마기념관 마당에서 시작한다.

-청마기념관에서, 시와 첫 문장 열기-


바람결에 유치환의 시가 번졌다.

아아 그대는 일찍이
나의 청춘을 정열한
한 떨기 아담한 꽃

그 시 한 줄이 발끝에서 스며들었다.
“걷는 순간이 곧 여행”이라는 내 문장이 더 또렷하게 마음속을 지나간다.

오늘의 구두점은 숨, 문단은 발걸음이다.

-둔덕으로 오르며, 시 한 줄을 들이마시다-


흙길과 돌계단이 번갈아 이어지고, 억새가 길을 비켜준다.
숨은 정직했고, 땀은 성실했다. 가을 냄새가 폐 깊숙이 들어와 오래된 마음을 환기시킨다.

-폐왕성(둔덕기성), 고려의 기억 위에서 맞는 가을-


‘폐왕성’이라 불리는 둔덕기성. 고려 의종이 잠시 유배되어 머물렀다는 사연이 성곽의 바람에 아직 남아 있다.
권좌에서 밀려난 한 사람의 쓸쓸함이 이 능선과 바다에 겹겹이 앉아, 풍경을 더 깊고 넓게 만든다.

성벽 위에 서니 사방이 열렸다. 바다는 은빛으로 껍질을 벗고, 산과 들이 겹겹이 포개진다.
패배의 시간을 품은 자리에서 맞는 가을빛은 묘하게 따뜻하다.


이름은 ‘폐(廢)’지만, 눈앞의 조망은 온전한 왕관. 정말, 너무 멋졌다.

-성에서 내려오며, 마음의 경계가 풀리다-

돌과 풀 사이로 발을 디딜 때마다 생각의 매듭이 하나씩 풀린다.
유배의 시간이 그랬듯, 내려섬은 늘 조용하다.
물 한 모금이 목을 적시고, 나는 다시 여행자가 된다.

-오량교차로, 삶의 사거리에서 잠깐 멈춤-

차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도시의 심장처럼 뛰었다.
방향을 고르는 일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시작된다.
신발끈을 한 번 더 조이고, 깃발이 가리키는 쪽으로 발을 옮긴다.

-거제대교, 바다 위에 찍는 느낌표-


난간을 스치는 바람이 시원스레 다가온다.
파도는 쉼표가 되어 다리 밑을 두드리고, 섬과 섬을 잇는 강철 문장이 반짝인다.
이유 없는 그리움이 스쳤지만, 여행은 이유 없이도 충분하다.

-신촌마을, 오늘의 마침표-

구 거제대교를 건너 목적지인 신촌마을에 도착했다.
정류장 벤치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, 방금 지나온 문장들을 마음속에서 다시 낭독한다.
버스 창밖으로 스쳐가는 길들은 고요한 박수처럼 이어졌다.

*코스 간단 정리*


경로: 청마기념관 → 둔덕기성(폐왕성) → 오량교차로 → 거제대교 → 신촌마을

거리/시간: 약 10.5km, 3~4시간 여유롭게
교통: 원점회귀는 신촌에서 42번 버스로 방하마을(청마기념관) 이동


반응형

댓글